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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탄광
5.
하시마탄광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하시마
6.
타카시마탄광 공양탑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다카시마
7.
징용희생자위령비후쿠오카현 오무타시 쿠라나가
8.
순직자위령비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사이토자키 316
9.
미타테묘지후쿠오카현 이와키시 유게타 3709
10.
신오카탄광 제3갱 순직자 위령의 비후쿠오카현 다카와시 이토다마치 미야가와 2735-2
11.
조선인 탄갱순난자의 비후쿠오카현 다카와시 카와미야 1385
12.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후쿠오카현 다카와시 이타
13.
탄광순직자위령비야마구치현 오노다시
14.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야마구치현 우베시 1-23
15.
아시오 조선인 강제연행 희생자 위령비도치기현 닛코시
16.
조반탄전 조선인 노무희생자의 비후쿠오카현 이외키시 나가하시마치 23
17.
사도광산니가타현 사도시 시모마이카와 1305
18.
나나쓰다테 조혼비아키다현 오다테시 하나오카마치
전쟁
28.
아리랑 위령의 모뉴멘트오키나와현 시마지리군 도카시키촌
29.
한국인위령탑오키나와현 이토만시 마부니
30.
평화의 초석오키나와현 이토만시 마부니
31.
사리타마의 탑오키나와현 시마지리군 도카시키촌
32.
슈리성 일본군 제 32군 사령부 지하호오키나와현 나하시 슈리마와시초
33.
다치소 지하호오사카부 다까쓰키시 나리아이
34.
야마토해군항공대 야나기모토 비행장 설명판나라현 덴리시 도다초
35.
도난카이 지진 추도기념비아이치현 나고야시 미나미구 5-15-18
36.
도요카와해군 공창전몰자 공양탑아이치현 도요카와시 이나리공원
37.
싱가폴창기순난자위령비도쿄도 오타구 이케가미 1-31-10 묘켄도
38.
아사카와지하호도쿄도 하치오지시 하쓰자와마치・다카오마치
39.
마쓰시로대본영조선인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나가노현 나가노시
글 / 사진 안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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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노동자는 일본 근대화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기지 건설에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철도, 탄광,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졌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석탄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석탄 생산량 증가는 단순히 기술발전 때문이 아니었다.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력 덕분에 가능했다. 가장 위험한 공사 구간마다 조선인 노동자가 전면 배치됐다.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사는 경술국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훨씬 전부터 탄광, 철도, 발전소 건설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 불쏘시개였다.

‘일본 덕분에 한국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일본 우익들의 근거 없는 주장은 이렇게 반박된다. 조선인 노동자들 덕분에 일본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그 증거가 바로 일본 열도 곳곳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름이라고. 지금의 교통편으로도 찾아가기 쉽지 않은 오지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확인 된 조선인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는 일본 내 약 160곳. 그중 80곳을 직접 확인했다. 조선인 이름 그대로, 또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때로는 이름조차 없이 세워진 비석은 수탈의 역사나 제국주의 침략과 학살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일본 공식 문서와 문헌 등 자료를 찾아 역사적 해석을 더했다. 비로소 흩어진 점(비석)이 선(역사)이 되었다.

구마가와 계곡 절경을 가르며 달리는 두 량짜리 관광열차 ‘이사부사호’는 하루 네 번 오코바 역에 관광객을 풀어놓는다. 낡은 목조건물이 매력적인 무인역 오코바는 구마모토현에서 가고시마현까지 이어지는 히사쓰 선의 대표 명소다.

오코바 역사 안에는 한국어로 된 관광객 메모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하지만 오코바 역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언덕의 선로 오른쪽 한구석에 낡은 비석이 하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철도공사 중 순난 병몰자 추도기념비’. 1908년 10월 세워진 이 추도비에는 사망 일자, 출신지, 이름, 연령순으로 명단이 새겨져 있다. 명단 가운데 낯익은 모양의 이름이 보였다.

최길남. 한국 경기도 남양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서른셋의 노동자. 1908년 3월16일 오코바 역 주변 공사 현장 사고로 사망.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추도비다. 이 추도비는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이주 시점을 짐작케 한다. 1910년 경술국치 2년 전이다. 최씨를 비롯한 조선인들은 경부선과 경인선 공사에 참여했던 ‘경력자’였다. 전범기업으로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건설사는 조선인 덕분에 이전의 손실을 보전하고 이익을 창출했다고 평가했다. 전쟁용 물자를 실어나를 철도를 까는 저임금 노동자로 혹사당했다.

1.
고베전철조선인노동자의상효고현 고베시 효고구 에게야마초 3

고베전철은 고베아리마전철(1927~1928년 부설)과 미키전철(1936~1937년 부설)을 1947년 합병하며 설립되었다.

1920~1930년대 부설공사에는 1200~18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에 참여했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5건의 사망 사건이 있었고, 조선인 사망자는 모두 13명이었다. 1927년에는 12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가하는 파업도 있었다. 1994년부터 희생자 가족을 초대하여 매년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2.
단나터널공사순직비시즈오카현 아타미시 7

도카이도 본선의 아타미 역과 간나미 역을 연결하는 총연장 7804m의 단나터널은 철도용 복선터널로 일본에서 가장 길다.

1918년 착공됐지만 지진은 물론 다이너마이트, 낙반, 출수, 감전 등의 사고로 공사가 지연된다. 16년 뒤인 1934년 개통했다.

1920년대 아타미선 공사에는 1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1941년부터 시작된 신단나터널 공사에도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단나터널 공사로 67명의 노동자가 순직했다. 철도성이 아타미 역 방면 터널 입구 위에 순직비를 세웠다.

67명의 순직자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는 7명.

간나이 역 방면에서 공사를 담당했던 건설사 가지마구미는 터널 서편 입구에 별도로 단나터널공사순직자위령비를 세웠다.

순직자 67명 가운데 조선인의 이름은 6명이다.

3.
시미즈터널공사순직비나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군

조에쓰선(上越線)은 군마현과 니가타현을 연결하는 중요 간선이다.

1918년 착공해 1931년에 완성됐다. 표고 2000m의 계곡을 관통하는 시미즈터널 공사는 최대의 난공사였다.

전장 9702m로 당시 동양 최대의 터널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는 니가타현, 군마현 출신자에 이어 3위로 전체 10%의 비중을 차지했다.

공사는 3교대로 하루 8~10시간의 중노동이었다. 많을 때는 조선인 1000명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10년이 걸린 시미즈터널 공사에는 연인원 350만명이 넘는 노동자가 공사에 참여했다. 낙반과 용수 등의 사고로 49명이 사망했다.

조에쓰선의 즈치타루(土樽) 역 가까이에 있는 순직비는 1931년 8월 철도성 나가오카사무소가 건립했다.

4.
이야마선나가노현 도요노역 ~ 니가타현 에치고가와구치역

나가노현 도요노 역에서 니가타현 에치고가와구치 역까지 시나노카와 강변을 따라 달리는 이야마선이다. 이 선로의 가장 위험한 터널 공사 최전선에 조선인 노동자가 배치되었다.

1927년 7월31일 다자와터널 공사에서 낙반사고가 발생해 18명이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 5명은 조선인 노동자였다. 다자와터널순난자추모비가 다자와 역 구내에 건립되었다는 기사가 있지만 현재 추모비 소재는 불명확하다.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있는 조세이 해저탄광은 1914년 채굴을 시작했다. 1942년 2월3일 해수압의 영향으로 낙반하면서 수몰 사고가 일어난다. 해저 30m 아래서 작업하던 광부 183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136명이 조선인 노동자였다. 사고 이후 탄광은 폐쇄되었고, 이들의 시신은 아직도 바닷속 갱도에 묻혀 있다. 비슷한 사고는 비일비재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호황을 맞은 일본은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전쟁 확대로 주문이 폭주하면서 노동자 확보는 일본 산업계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이른바 ‘모집인’이 조선 각지에 잠입한 것도 이즈음이다. 감언이설에 속아 대한해협을 건넌 노동자들은 주로 밀항으로 입국했다. 지쿠호 탄광 지역에 살면서 광산 노동자의 삶을 기록해온 논픽션 작가 우에노 에이신은 탄광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실어 나른 석탄 운반선을 ‘노예선’이라고 불렀다.

5.
하시마탄광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하시마

하시마는 멀리서 보면 군함 한 척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라고도 부른다.

하시마에는 1916년 일본 최초로 철근콘크리트아파트가 건설되었다. 채탄을 위해 입도한 광부의 주거와 편의시설을 제공하기 위해 세워진 중고층 아파트들이 군함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1945년 하시마의 인구는 5300명으로 일본 내 최고 인구밀도를 자랑했다. 하시마탄광은 가혹하고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지옥섬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1944년 11월 집계한 다카시마탄광의 탄광노무자는 5974명이고 이 가운데 2259명이 조선인이었다. 한 층에 방 5개가 있는 2층 건물 4동에 수용됐다.

노동력 부족 때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개 농촌 출신이고, 채탄을 위한 별도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나가사키의 시민단체 ‘인권을 지키는 회’가 1925년~1945년까지 화장 기록을 통해 파악한 조선인 사망자는 122명이다.

6.
다카시마탄광 공양탑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다카시마

미쓰비시광산의 다카시마탄광이 있었던 나가사키시 다카시마 산 중턱에 있는 공양탑은 천 명 이상의 유골이 묻혀 있다 하여 ‘천인총’으로도 불린다.

1920년 건립됐다. 다카시마탄광이 1984년 폐광하면서 납골당에 있던 유골들은 제멋대로 분골되어 부근 절인 긴쇼지로 옮겨졌다.

유골들에 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7.
징용희생자위령비후쿠오카현 오무타시 쿠라나가

메이지 일본의 산업유산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미케탄광에도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는 한켠에 밀려 있다.

1995년 탄광 도시 후쿠시마현 오무타시 아마기공원 언덕에 세워진 징용희생자위령비에는 노동자 사택 벽에 씌여진 망향의 낙서를 담은 조형물이 함께 하고 있다.

비문에는 “제2차 세계대전 시 이 땅에 강제로 징용되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시다가 불귀의 혼”이 된 넋들을 기리고 있다.

8.
순직자위령비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사이토자키 316

사키토자키 씨사이드 컨트리클럽의 정문을 지나 왼편으로 사이토자키탄광 갱구 자리 안쪽에 세워진 순직자 위령비. 사이토자키탄광은 1937년 채탄을 시작해서 1964년 폐광했다.

순직자 위령비는 1964년 8월에 건립되었다. 위령비에는 “모래 하얗고/소나무 푸르러/이곳 광산에/목숨을 바친/ 굳센 무리들이여”라고 새겨져 있다.

정면과 측면에 64명의 순직자 이름이 있다. 조선인 노동자 3명 이름과 더불어 창씨개명한 6명의 이름이 있다.

9.
미타테묘지후쿠오카현 이와키시 유게타 3709

지쿠호 탄광 지대의 절이나 납골당에는 탄광 사고로 죽은 조선인 유골이 아직도 산재해 있다.

1927년 7월31일 다자와터널 공사에서 낙반사고가 발생해 18명이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 5명은 조선인 노동자였다. 다자와터널순난자추모비가 다자와 역 구내에 건립되었다는 기사가 있지만 현재 추모비 소재는 불명확하다.

10.
신오카탄광 제3갱 순직자 위령의 비후쿠오카현 다카와시 이토다마치 미야가와 2735-2

태풍이 몰아쳐 정전 상황에서 스위치를 끄기 위해 갱 내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16세의 조선인 광부 강상구는 1981년 ‘신오사카 탄광 제3갱 순직자 위령의 비’가 세워질 당시만 해도 ‘신원 불상’이었다.

2009년 한국 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로 ‘강상구’라는 이름이 찾게 되는 과정이 위령비 뒷면에 ‘생명 사랑 인권’이라는 제목을 달고 기술되어 있다.

11.
조선인탄갱순난자의비후쿠오카현 다카와시 카와미야 1385

‘15년 전쟁’(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패전까지) 때문에 일본 국내 노동력이 부족하자 모집, 알선, 징용, 강제 동원 등의 형태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동원했다.

지쿠호 지역의 탄광에는 15만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이 순난비 옆에 있는 설명판에는 “살아서 조국산천과 혈육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억울하게 숨지어간 조선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이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이여 모두 다 력사의 사실을 가슴에 새겨두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순난비 정면에 써있는 ‘적광(寂光)’이란 ‘상적광토(常寂光土)’, 즉 항상 고요한 빛이 차넘치는 세계인 극락정토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1975년 1월에 세워졌다.

12.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후쿠오카현 다카와시 이타

다카와시 석탄역사기념박물관이 있는 교통공원 내 작은 언덕에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그 중 하나가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다.

친남한 계열인 재일민단과 친북한 계열인 조선총련이 공동으로 위령비를 건립하기 위해 협의를 진행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해 1988년 4월 민단이 독자적으로 건립했다.

이곳에 있던 유골은 현재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모셔져 있다.

13.
탄광순직자위령비야마구치현 오노다시

오노다시 신스즈메다(新雀田)탄광 폐산을 계기로 순직자들을 위령하기 위해 만후쿠지(万福寺)에 건립을 추진하면서 신스스메다탄광의 전신인 와카오키(若沖)탄광 순직자도 합사해 1963년 10월 30일에 완성됐다.

127명의 순직자 가운데 9명이 조선인 노동자다.

14.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야마구치현 우베시 1-23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은 1914년 채굴을 시작한 해전탄광이다.

해수압의 영향으로 낙반하면서 발생한 수몰사고가 1942년 2월3일 일어나 해저 30m 아래에서 작업하던 광부 183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136명이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시신은 아직도 바다 속 갱도에 묻혀 있다.

조세이탄광수몰사고희생자추도비는 2013년 2월2일에 건립되었다.

추도비는 조세이탄광의 환기구인 피아를 의미하는 상징물 기둥 2개에 ‘일본인 희생자’와 ‘강제연행 한국조선인 희생자’를 새겨넣었다.

15.
아시오 조선인 강제 연행 희생자 위령비도치기현 닛코시

도치기현 니코시에는 동광산으로 유명한 아시오광산이 있다.

1940년~1945년 8월까지 2416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다.

도치기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화장 허가서와 과거장을 조사해서 73명의 조선인이 사망한 기록을 찾아냈다.

16.
조반탄전 조선인 노무희생자의 비후쿠시마현 이외키시

조반탄광은 후쿠시마현에서 이바라기현에 걸쳐 있는 탄광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조반탄광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2만명 전후.

‘조선인노무희생자의 비’는 1947년 10월22일 재일조선인연맹의 주도 하에 건립되었다. ‘산업전사’라는 미명 하에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침략전쟁 때문에 죽음에 이른 조선인 노동자 193명을 기리고 있다.

17.
사도광산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은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금은광산이다. 1896년 미쓰비시가 인수한 이후 1989년 채굴이 중단될 때까지 미쓰비시광업 소속이었다.

전시 기간에 조선인 1000명 정도가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금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사도광산에 있는 조선인 광부들은 다른 지역의 광산으로 이동하거나 군수공장에 전환배치되기도 했다.

18.
나나쓰다테 조혼비아키다현 오다테시

전시 중인 1944년 5월 29일 하나오카광산의 나나쓰다테 갱 낙반 사고로 생매장된 22명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1947년 건립됐다.

희생자 22명 가운데 조선인은 11명.

나나쓰다테 사건은 격화되는 전쟁 속에서 증산 우선과 안전을 무시한 생산 체제 때문에 발생한 전형적인 인재였다. 도와(同和)광업 하나오카광업소는 사건 후 10년 뒤인 1955년 외무성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는 조난자들의 위치를 모두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갱도 확보와 생산 유지를 위해 구출 작업을 중단하고 함몰 지역을 매립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생존 광부를 생매장한 것이다.

이후 나나쓰다테 갱 채굴은 노천 채굴로 재개되었지만 유체 수습이나 유골 발굴은 진행되지 않았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1920~1930년대 집중적으로 지어진 여러 발전소와 댐에는 현장마다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있었다. 발전소 공사로 온 조선인 노동자 자녀가 지역 소학교에 100명 넘게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나가쓰가와 발전소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600여명이었다. 1922년 7월 ‘지옥의 계곡’이라 불렸던 공사 현장에서 도망치다 잡힌 조선인 노동자를 일본인 감독이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대적인 진상조사가 벌어졌고 일본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계기가 됐다.

19.
삼계만령탑시즈오카현 하이바라군 모토후지카와 850

1920~30년대에 걸쳐서 오이카와 철도 공사, 발전소 공사에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강제동원 시기 일본발송전(日本発送電)은 구노와키(久野脇)발전 공사를 진행했고, 공사 현장에는 22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연행되었다.

삼계만령탑은 발전소 공사를 진행한 중부전력과 다이세이건설이 1967년에 건립한 것이다. 사망자 12명의 이름 가운데 3명은 조선인이고 1명은 불확실하다.

20.
오이카와발전소 위령탑시즈오카현 하이바라군

오이카와발전소공사는 오이카와의 서쪽 산에 도수로를 굴삭하는 작업이 난공사였다. 공사는 하자마구미와 오쿠라구미가 담당했다.

1930년대에 이루어진 발전소 공사는 군수산업을 확장하기 위한 ‘국책’ 전원 개발 사업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저임금으로 동원되어 함바에서 생활을 했고,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다.

1936년 11월에 건립된 오이카와발전소 위령탑에는 하자마구미 소속 3명, 오쿠라구미 소속 9명 등 모두 12명의 조선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21.
사가미댐 위령탑가나카와현 사가미하라시 미도리구 와카야나기

사가미댐은 1940년에 공사를 시작해 1947년에 완성한 일본 최초의 다목적댐이다. 공사를 위해 연인원 350만명이 동원되었다.

이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가 60%를 차지한다. 조선인만이 아니라 포로가 되거나 강제동원된 중국인도 공사에 참여했다.

가혹한 노동과 식량 부족, 질병, 사고 등으로 83명이 사망, 이 가운데 조선인은 17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나무 묘표만이 있었으나 1962년 위령탑을 건립했다. 52명의 순직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22.
순직자의 비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 다마코초 3

도쿄도 수도국은 일본 군부의 요구에 의해 오코치댐 건설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을 제방공사, 방공호 공사에 동원했다.

순직자의 비에는 야마구치저수지제방공사 때 사망한 4명의 노동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2명은 창씨개명한 조선인 노동자. 이름 앞에 본적이 ‘조선’임을 기록하고 있다. 1945년 10월 28일에 세워졌다.

23.
오코치댐 공사 위령비도쿄도 니시타마군 오쿠타마정

도쿄도 수도사업으로 16년에 걸쳐서 완성된 오코치댐은 연인원 60만명이 동원된 대규모토목공사였다.

이 댐의 건설은 도쿄도민의 수도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목적. 전쟁 중의 공사로 25명이, 전후의 공사로 62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은 모두 6명. 도쿄도 수도국이 1958년 3월 20일에 건립했다.

24.
오키다테위령비니가타현 도카마치시

니가타현 시나노카와의 센쥬발전소 부근에 세워진 오키다테 순직비. 오카다테 방수로 공사 중 순직한 노동자를 위령하기 위해 니시모토구미가 1937년 세웠다.

‘安ヒ伏’이라고 한자와 히라카나를 섞어 새겨놓은 이름은 조선인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25.
미야나카댐 순직자 위령의 비니가타현 도카마치시

구 철도성은 철도 운행을 위한 전원을 개발하기 위해 시나노카와 3곳에 댐과 발전소를 건설했다.

미야나카댐은 발전소의 취수구. 1기 공사는 9년이 걸려 1939년에 완성되었고, 1940년부터 2기 공사가 진행되어 1945년에 완성되었다. 순직자위령의 비는 미야나카댐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있다.

1936년 9월에 세워진 비에는 조선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창씨개명한 조선인 듯한 이름이 3명 보인다.

26.
나가쓰와제1발전소니가타현 나카우오누마 쓰난정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특수로 일본은 전력 수요가 급증했다. 신에쓰전력은 1200명의 노동자를 동원해 니가타현 나카쓰카와에 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은 600여명. 지옥의 계곡이라 불리우는 호쿠에쓰의 공사 현장에서 도망치다 잡힌 조선인 노동자를 학살하는 사건이 1922년 7월 발생했다.

게토라는 노동자들의 숙소가 있던 현장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특파원을 파견해 현장 기사를 보냈다. 이 사건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27.
히메관음아키타현 센호쿠시

1940년에 완성된 오보나이발전소. 다마카와와 센다쓰카와에서 다자와호수로 이어지는 다자와코도수로공사는 전동굴착기를 사용하지 않고 진행한 수작업의 지난한 공사였다.

오보나이발전소 공사는 도호쿠지방을 식량생산과 군수산업의 대 기지로 만들려고 하는 ‘도호쿠진흥계획’의 일환으로 입안된 국책사업이었다.

히메관음의 설명판에는 다자와코도수로공사로 유입된 독수로 인해 멸종된 물고기의 위령을 위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 부근 절에서 발견된 ‘히메관음상건립취지서’에는 터널공사로 희생된 공사관계자의 공양과 위령을 위한 목적이 가장 중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위령비나 추모비는 1945년 일본 패전 후 세워졌다. 오키나와 남부 마부니 언덕에 세워진 ‘평화의 초석’이 대표적이다. 1995년 6월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국적이나 신분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전몰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전쟁 범죄가 새로이 규명될 때마다 명단은 추가된다. 지난 6월23일 ‘위령의 날’에는 한국 출신자 이름 2명이 더해졌다.

28.
아리랑 위령의 모뉴멘트오키나와현 시마지리군 도카시키촌

일본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배봉기를 비롯해 기쿠마루(당시 28세), 가즈코(당시23세), 하루에(당시 23세), 스즈란(당시 20세), 아이코(당시 16세), 밋짱(당시 16세) 등 조선인 여성 7명은 오키나와현 도카시키 섬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왔다.

박수남 감독이 만든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에도 증언을 했던 배봉기 할머니가 죽은지 닷새 만에 발견된 사건을 계기로 모뉴먼트 건립 운동을 통해 세워진 위령비다.

다시는 침략전쟁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진실을 증언하고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광장이 될 것을 염원하면서 1997년 11월 조성된 공간이다.

29.
한국인위령탑오키나와현 이토만시 마부니

1975년 마부니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 초입에 세워진 한국인위령탑은 징병, 징용으로 동원된 1만 여명의 피해자를 상징하는 돌들로 커다란 무덤을 만들었다.

돌은 한국의 각지에서 모았다.

한국인위령비는 대외적으로 민단 오키나와현본부가 중심이 되어 건립을 했지만 한국 정부의 절대적인 재정지원이 있었다.

1974년 ‘전시 중 오키나와에서 한국인 대량학살이 있었고, 북한이 위령탑 건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주일한국대사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북한보다 먼저 세우겠다’라고 보고하며 이뤄졌다.

당시 한국 외교통상부는 (위령비 건립의) 주목적을 ‘오키나와 침투를 기획하는 북한의 책동 봉쇄’라고 규정하고 ‘총련의 탑 건립 신청은 허가하지 않도록 일본 정부에 강력히 요청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한국인위령탑의 건립과정은 한반도 남북의 분단과 대립이 오키나와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30.
평화의 초석오키나와현 이토만시 마부니

오키나와전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오키나와 남부 마부니 언덕에는 평화의 초석이 세워져 있다.

평화의 초석은 종전 50주년을 기념해서 국적, 군인과 민간인 여부에 관계없이 오키나와전 전몰자 이름을 모두 기록하기 위해 1995년 6월에 건설되었다.

평화의 초석에는 오키나와 출신자를 비롯한 일본인 22만6936명, 외국인 1만4587명 등 모두 24만152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외국인 전몰자 가운데 북한 출신자는 82명, 한국 출신자는 380명이다.

올해 6월 23일 ‘위령의 날’에 한국 출신자 2명의 이름이 새롭게 새겨졌다.

31.
사리타마의 탑오키나와현 시마지리군 도카시키촌

1944년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고, 미군이 상륙한 3월27일과 28일 도카시키 섬에서는 섬주민 330명이 ‘집단자결’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시라타마의 탑에는 일본 본토 군인 81명, 군인군속 91명, 방위대 42명, 주민383명, 그리고 ‘위안부’ 1명이 모셔져 있다.

탑에 이름은 없지만 처형 당한 3명과 아사한 7명, 미군기의 기총소사로 사망한 ‘위안부’ 1명 등 11명의 조선인이 모셔져 있다.

32.
슈리성 일본군 제32군 사령부 지하호오키나와현 나하시 슈리마와시초

오키나와현의 나하시 슈리성 땅 밑으로는 오키나와전을 지휘하던 일본군 제32군 사령부의 지하호가 있다.

지하 30m, 남북으로 390m에 이르는 지하호 건설은 조선인 군부(군소속 노동자)가 동원되었고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지하호 안에는 위안소도 있었다고 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고등학생들이 평화를 생각하는 수학여행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제는 평화기행도 시들한 모양새다. 지하호 입구에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남기고 간 오래된 종이학이 남아 있었다.

33.
다치소 지하호오사카부 다까쓰키시 나리아이

‘다치소’는 다키쓰키 지하창고를 의미하는 암호명.

다카쓰키의 나리아이(成合) 지역 산간부에 30여개의 터널군을 지칭한다. 원래 육군의 저장고로 계획되어 1944년 11월 공사가 개시되었지만 1945년 2월 가와사키 항공기 공장으로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공사에는 지역 주민은 물론 학생들도 동원되었고, 3500명이 넘는 조선인도 동원되었다.

34.
야마토해군항공대 야나기모토비행장 설명판나라현 덴리시 도다초

나라현 덴리시에 있는 야나기모토 비행장은 1943년부터 일본 패전때까지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 공사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로 동원되었다. 또한 조선인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조선반도에서 끌려온 역사를 담고 있다.

지금은 논으로 변한 야마토 해군항공대 야마토기지 유적지에 1995년 8월 덴리시교육위원회가 처음 설명판을 세웠다.

설명판에는 조선인 노동자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2014년 4월 시교육위원회는 설명판 내용 가운데 ‘강제성’이라는 표현이 불확실하다라는 이유로 철거했다.

일본의 덴리시와 자매도시인 충북 서산시의 시민이 함께 2019년 4월13일 설명판을 다시 설치했다.

35.
도난카이지진추도기념비아이치현 나고야시 미나미구 5-15-18

1944년 12월7일 도카이 지방에 진도8의 대규모 지진이 일어났다.

군용기를 생산하고 있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도토쿠 공장의 건물은 거의 붕괴했다. 이 공장에 동원되었던 노동자와 근로정신대원 57명이 지진으로 사망했다.

이 가운데 6명은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돈도 벌게 하고 학교에도 다니게 해주겠다고 속여 데리고 온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이었다.

1897년 도난카이지진희생자조사추도실행위원회가 피해자들을 조사하면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동원이 세상에 알려졌다.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이곳에 진실을 새긴다’라는 비명의 추도비는 1988년 세워졌다.

36.
도요카와해군공창전몰자공양탑아이치현 도요카와시 이나리공원

도요카와해군공창은 700개의 공장에 6만 명이 일하던 동양 최대 규모의 해군용총화기탄약제조공장이다. 1945년 8월7일 미군의 공습으로 2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강제동원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도 포함되어 있다. 공양탑에 새겨진 조선인의 이름은 23명.

‘도요카와해군공창화공부종업원명단’에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출신 150명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20대 초반이다.

1946년 9월23일 완성했다.

37.
싱가폴창기순난자위령비도쿄도 오타구 이케가미 1-31-10 묘켄도

중국과 동남아 전선에 군인으로, 연합군의 포로를 감시하던 포로감시원으로 있었던 조선인 148명은 전후 국제전범재판에서 사형, 종신형, 장기구금 등의 선고를 받았다.

BC급 전범이 된 조선인들이다.

싱가폴 창기에서는 146명의 일본군 군인군속에 대한 연합군의 군사재판이 열렸다.

이들은 BC급 전범자로 지목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싱가폴창기순난자위령비에는 싱가폴에서 BC급 전범으로 처형된 조선인이 15명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38.
아사카와지하호도쿄도 하치오지시 하쓰자와마치・다카오마치

도쿄도 하치오지시 하쓰자와마치와 다카오마치 산간 지역에 있는 지하호다. 전쟁말기 일본 육군의 주문으로 나카시마 비행기의 항공기 엔진제조를 위한 지하호로 굴착되었다.

1944년 일본 육군의 지하호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지하호 건설에는 노동자 7000명 정도가 동원되었다.

이 가운데 사이토공업 소속으로 500명 정도가 가족과 함께 2개의 함바에서, 오쿠라토목 관계로 수백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1개의 함바에 살면서 공사에 동원되었다.

39.
마쓰시로대본영조선인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나가노현 나가노시

일본이 패전의 기미가 역력해지던 1944년 11월11일 대본영은 나가노현에 대규모 지하호 건설을 시작한다. 천황은 물론 일본방송협회, 대본영도 대피하는 시설이었다. 1만 명 정도 인력이 동원되었는데, 이 가운데 7000명이 조선인이었다.

8시간 3교대, 12시간 2교대로 지하호의 굴착은 대부분 조선인 노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공사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이어져 9개월만에 10킬로미터의 지하호 공사가 진행되었다. 1990년 지하호가 공개된 이후 입구에는 “300만 명의 주민 및 조선인들이 노동자로 강제적으로 동원되어...”라는 내용이 들어간 설명판이 세워졌다.

2013년 나가노시 관광진흥과는 ‘강제적으로’라는 부분을 접착테이프로 가렸다. 2014년 11월13일 새로운 설명판이 세워졌다.

새로운 설명판에는 “조선과 일본인들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략) 모두가 강제적은 아니었다”라는 표현으로 ‘강제성’을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비석에는 한반도 식민의 역사는 물론 분단의 역사마저 고스란하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일본에 있는 민족단체도 마찬가지 수순을 밟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설립 주체에 따라 조선총련에서 세운 위령비는 ‘조선인’으로, 재일민단에서 세운 위령비는 ‘한국인’으로 표기되었다.

돌보지 않은 이름들은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청구서’를 들고 언젠가 돌아온다.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올바로 매듭지어야만 비로소 전쟁에 제대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조선인 위령비가 보여주는 역사를 직시할 때,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된다.

40.
조선인수난비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기타구 에키마에초 2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강제 동원되어 오카야마현에 있는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와 차별을 받으면서 일하다 죽은 유골 78위를 모았지만 유족은 물론 생년월일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용서할 수 없는 행위에 ‘깊이 사죄를 표하기’ 위해서 1993년에 세운 비다.

41.
고베 평화의 비효고현 고베시 카이가도리 3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중국인, 조선인, 연합군 포로들에게 항만 하역 작업과 선박 건조 등의 가혹한 노동을 시켰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아시아의 평화와 공생을 맹세’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2008년 7월 21일 건립했다.

42.
우키시마마루 순난의 비교토부 마이즈루시 사바카

일본이 패전하자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해군시설 등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3735명은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에 승선해 8월21일 부산을 향해 출항한다.

연합군의 요구에 따라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마루의 항로를 바꾸어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8월24일 오후 5시20분경 마이즈루항으로 들어오던 중 폭발음과 함께 선체가 둘로 갈라지면서 침몰했다.

현지 주민의 구조 노력에도 불구하고 524명이 사망했다.

비석에는 “우리는 이 우키시마마루 사건을 풍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다짐을 새기고 있다.

1978년 8월24일 마이즈루항이 보이는 ‘순난의 비 공원’ 안에 세워졌다.

이 사건으로 사망한 북한 출신자 유골은 도쿄 유텐지에 모셔져 있다.

43.
한다 전재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아이치현 한다시 세이시로초 카리야다공원

1981년 발족한 시민단체 ‘한다 공습과 전쟁을 기록하는 모임’이 공습 등으로 군수 공장에서 일하던 사망자들을 조사했다.

1990년대까지 조사로 공습 사망자 272명 이상, 지진 사망자 154명, 노동재해 사망자 66명 등 사망자 432명을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나카지마 비행기 한다제작소에 조선 청년 1200명이 강제동원되어 공습으로 48명, 노동재해로 1명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카지마비행기가 작성한 명단을 기초로 희생자 이름을 파악, 1995년 7월24일 비석을 세웠다.

40.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군마현 다카사키시 와타누키마치 239 현립공원 군마노모리

일본에서 유일하게 현립 공원 안에 세워진 조선인강제동원희생자 추도비다.

추도비에는 “과거 일본이 조선인에 대해서 크나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의 사실을 깊이 기억에 새기고 진심으로 반성하여 다시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있다.

2004년 4월24일에 건립된 이 비석은 2013년 12월18일 현 당국에 설치 기간 갱신 허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일부 시민으로부터 항의를 받은 현 당국은 갱신을 불허하고 비의 철거를 명령했다.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의 추도비를 지키는 모임’은 2014년 11월 현을 상대로 불허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 소송을 시작, 현재까지 진행중이다.

45.
제2차세계대전전시징용 조선인 희생자 위령의 비군마현 오타시 카나야마초40-1

나카지마 비행기 오타제작소에 강제동원되어 일하던 많은 조선인 가운데 9명이 1945년 2월10일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다.

이를 추도하고 한일 양국의 우호 친선을 깊이 하면서 세계 평화에 공헌할 것을 결의하는 의미로 1973년 4월8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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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 흩어진 역사, 잊혀진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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