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 근대화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기지 건설에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철도, 탄광,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졌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석탄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었다. 석탄 생산량 증가는 단순히 기술발전 때문이 아니었다.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력 덕분에 가능했다. 가장 위험한 공사 구간마다 조선인 노동자가 전면 배치됐다. 조선인 노동자의 이주사는 경술국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강제노동 훨씬 전부터 탄광, 철도, 발전소 건설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준 불쏘시개였다.
‘일본 덕분에 한국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일본 우익들의 근거 없는 주장은 이렇게 반박된다. 조선인 노동자들 덕분에 일본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그 증거가 바로 일본 열도 곳곳에 있는 비석에 새겨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름이라고. 지금의 교통편으로도 찾아가기 쉽지 않은 오지에 조선인 노동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확인 된 조선인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는 일본 내 약 160곳. 그중 80곳을 직접 확인했다. 조선인 이름 그대로, 또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때로는 이름조차 없이 세워진 비석은 수탈의 역사나 제국주의 침략과 학살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일본 공식 문서와 문헌 등 자료를 찾아 역사적 해석을 더했다. 비로소 흩어진 점(비석)이 선(역사)이 되었다.
朝鮮人労働者は日本の近代化にとって‘心臓’に違いない。戦争の基地建設に動員されただけではなく、鉄道、炭鉱、発電所の建設現場で安い労働力で雇われた。日本の近代化の過程で石炭は欠かせない一番重要なエネルギー源だった。石炭の生産量が増加したのは日本の技術の発展だけではなかった。朝鮮人労働者の労働力があったからこそ可能になった。一番危険な工事区間には朝鮮人労働者が前面に配置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移住史は庚戌国恥以前にさかのぼる。日本の植民地時代の強制労働の遥か前から炭鉱、鉄道、発電所の建設に投入された。朝鮮人労働者は日本が飛躍的に発展出来るように助けた起爆剤になった。
‘日本のお陰で韓国がこんなに裕福になった。’と日本の右翼達の根拠のない主張はこのように反論出来る。むしろ「朝鮮人労働者のお陰で日本がこんなに裕福になった」「その証拠がまさに日本各地にある碑に刻まれている朝鮮人労働者達の名前である」と。全国各地の奥地に朝鮮人労働者達の痕跡が多く残っている。現在まで確認された朝鮮人の名前が刻まれた慰霊碑は日本国内に約160ヶ所、その中で80ヶ所は直接確認した。朝鮮人の名前で、または改名した名前で、時には名前すらないままに建てられた碑は、収奪の歴史や帝国主義の侵略と虐殺の歴史を直接的に説明するには十分でない。そこで日本の公式文書と文献などの資料を見つけ、歴史的な解釈を加えて初めて散らばった点(碑)が線(歴史)になった。

구마가와 계곡 절경을 가르며 달리는 두 량짜리 관광열차 ‘이사부사호’는 하루 네 번 오코바 역에 관광객을 풀어놓는다. 낡은 목조건물이 매력적인 무인역 오코바는 구마모토현에서 가고시마현까지 이어지는 히사쓰 선의 대표 명소다.
오코바 역사 안에는 한국어로 된 관광객 메모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하지만 오코바 역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언덕의 선로 오른쪽 한구석에 낡은 비석이 하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철도공사 중 순난 병몰자 추도기념비’. 1908년 10월 세워진 이 추도비에는 사망 일자, 출신지, 이름, 연령순으로 명단이 새겨져 있다. 명단 가운데 낯익은 모양의 이름이 보였다.
최길남. 한국 경기도 남양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서른셋의 노동자. 1908년 3월16일 오코바 역 주변 공사 현장 사고로 사망.
조선인 노동자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추도비다. 이 추도비는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이주 시점을 짐작케 한다. 1910년 경술국치 2년 전이다. 최씨를 비롯한 조선인들은 경부선과 경인선 공사에 참여했던 ‘경력자’였다. 전범기업으로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건설사는 조선인 덕분에 이전의 손실을 보전하고 이익을 창출했다고 평가했다. 전쟁용 물자를 실어나를 철도를 까는 저임금 노동자로 혹사당했다.
熊川渓谷沿いを走る観光列車‘いさぶろう’は一日4回大畑駅で観光客を降ろす。古い木造建築が魅力的な無人駅の大畑駅は熊本県から鹿児島県までつなぐ肥薩線の代表的な名所だ。大畑駅内には韓国語で書いた観光客のメモも見られる。
しかし、大畑駅から200mほど離れた丘の線路の右側の隅に古い碑がある事を知る人は少ない。‘鉄道工事中、殉難病没者追悼記念碑’1908年10月に建てられたこの追悼碑には死亡日、出身地、名前、年齢の順で名簿が刻まれている。名簿の中で見覚えのある名前が見えた。
崔キルナム。韓国京畿道南陽君に住所を置いた33才の労働者。1908年3月16日、大畑駅周辺の工事現場の事故で死亡。
朝鮮人労働者の名前が初めて出て来た追悼碑である。この追悼碑から朝鮮人労働者の日本移住の始点が考えられる。1910年庚戌国恥2年前だった。崔氏を含め朝鮮人達は京釜線と京仁線の工事に参加した‘経験者’だった。戦犯企業で今も健在している建設会社は朝鮮人のお陰で以前の損失を保全し、利益を得たと評価している。戦争用の物資を運ぶ鉄道を敷く低賃金労働者として酷使された。
고베전철은 고베아리마전철(1927~1928년 부설)과 미키전철(1936~1937년 부설)을 1947년 합병하며 설립되었다.
神戸電鉄は神戸有馬電鉄(1927~1928)と三木電鉄(1936~1937)を1947年合併して設立した。
1920~1930년대 부설공사에는 1200~18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에 참여했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5건의 사망 사건이 있었고, 조선인 사망자는 모두 13명이었다. 1927년에는 12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가하는 파업도 있었다. 1994년부터 희생자 가족을 초대하여 매년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1920~1930年代の敷設工事には1200~1800名の朝鮮人労働者が工事に参加した。 当時、新聞記事によると、5件の死亡事件があり朝鮮人死亡者を合わせて13人だった。1927年には1200人の朝鮮人労働者が参加したストライキもあった。1994年から犠牲者の遺族を招待して毎年追悼会を開いている。
도카이도 본선의 아타미 역과 간나미 역을 연결하는 총연장 7804m의 단나터널은 철도용 복선터널로 일본에서 가장 길다.
1918년 착공됐지만 지진은 물론 다이너마이트, 낙반, 출수, 감전 등의 사고로 공사가 지연된다. 16년 뒤인 1934년 개통했다.
東海道本線の熱海駅と函南駅を繋ぐ7804mの丹那トンネルは鉄道用複線トンネルでは日本で一番長いトンネルだ。
1918年着工されたが地震はもちろん、ダイナマイト、落盤、出穂、感電などの事故のせいで工事が遅延され、16年後の1934年に開通した。
1920년대 아타미선 공사에는 1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1941년부터 시작된 신단나터널 공사에도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1920年代熱海線工事には1000人の朝鮮人労働者が参加していた。1941年から始まった新丹那トンネルにも朝鮮人労働者が動員され、その現場で67人が殉職した。
단나터널 공사로 67명의 노동자가 순직했다. 철도성이 아타미 역 방면 터널 입구 위에 순직비를 세웠다.
67명의 순직자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는 7명.
鉄道省が熱海駅方面のトンネル入口に殉職碑を建てた。
67人の内朝鮮人労働者は7人、函南駅方面の工事を担当した建設会社鹿島組はトンネル西側に別に丹那トンネル工事殉職者慰霊碑を建てた。
간나이 역 방면에서 공사를 담당했던 건설사 가지마구미는 터널 서편 입구에 별도로 단나터널공사순직자위령비를 세웠다.
순직자 67명 가운데 조선인의 이름은 6명이다.
殉職者67人の内、朝鮮人6人の名前が刻まれている。
조에쓰선(上越線)은 군마현과 니가타현을 연결하는 중요 간선이다.
上越線は群馬県と新潟県を繋ぐ重要な幹線である。
1918년 착공해 1931년에 완성됐다. 표고 2000m의 계곡을 관통하는 시미즈터널 공사는 최대의 난공사였다.
標高2000mの渓谷を貫通する清水トンネル工事は最大の難工事であった。標高2000mの渓谷を貫通する清水トンネル工事は最大の難工事であった。
전장 9702m로 당시 동양 최대의 터널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는 니가타현, 군마현 출신자에 이어 3위로 전체 10%의 비중을 차지했다.
全長9702mで、当時東洋最大のトンネルだった。
朝鮮人労働者は新潟県、群馬県出身者の次に多い人数で全体の10%を占める人数だった。
공사는 3교대로 하루 8~10시간의 중노동이었다. 많을 때는 조선인 1000명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10년이 걸린 시미즈터널 공사에는 연인원 350만명이 넘는 노동자가 공사에 참여했다. 낙반과 용수 등의 사고로 49명이 사망했다.
조에쓰선의 즈치타루(土樽) 역 가까이에 있는 순직비는 1931년 8월 철도성 나가오카사무소가 건립했다.
工事は3交代で一日8~10時間の重労働だった。多い時は朝鮮人1000人が動員された。10年もかかった清水トンネル工事には年間350万人を超える労働者が動員された。落盤と用水などの事故で49人が死亡した。
上越線の土樽駅の付近にある殉職碑は1931年8月鉄道省の長岡事務所が建てた。
나가노현 도요노 역에서 니가타현 에치고가와구치 역까지 시나노카와 강변을 따라 달리는 이야마선이다. 이 선로의 가장 위험한 터널 공사 최전선에 조선인 노동자가 배치되었다.
飯山線は長野県豊野駅から新潟県越後川口駅に至る東日本の鉄道路線である。この線路の一番危険なトンネル工事の最前線には朝鮮人労働者が配置された。
1927년 7월31일 다자와터널 공사에서 낙반사고가 발생해 18명이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 5명은 조선인 노동자였다. 다자와터널순난자추모비가 다자와 역 구내에 건립되었다는 기사가 있지만 현재 추모비 소재는 불명확하다.
1927年7月31日、田沢トンネルの工事で落盤事故が起こり、18人が亡くなったがこの中で5人が朝鮮人労働者だった。田沢トンネル殉難者追悼碑が田沢駅内に建立されたという記事があるが、現在追悼碑の所在地は不明だ。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있는 조세이 해저탄광은 1914년 채굴을 시작했다. 1942년 2월3일 해수압의 영향으로 낙반하면서 수몰 사고가 일어난다. 해저 30m 아래서 작업하던 광부 183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136명이 조선인 노동자였다. 사고 이후 탄광은 폐쇄되었고, 이들의 시신은 아직도 바닷속 갱도에 묻혀 있다. 비슷한 사고는 비일비재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호황을 맞은 일본은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유럽의 전쟁 확대로 주문이 폭주하면서 노동자 확보는 일본 산업계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이른바 ‘모집인’이 조선 각지에 잠입한 것도 이즈음이다. 감언이설에 속아 대한해협을 건넌 노동자들은 주로 밀항으로 입국했다. 지쿠호 탄광 지역에 살면서 광산 노동자의 삶을 기록해온 논픽션 작가 우에노 에이신은 탄광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실어 나른 석탄 운반선을 ‘노예선’이라고 불렀다.
山口県宇部市床波海岸にある長生海底炭鉱は1914年から採掘が始まった。1942年2月3日に海水圧の影響で落盤し、水没事故が起きた。海底30mで作業をしていた炭鉱夫183名が亡くなった。この内136人が朝鮮人労働者だった。事故以降炭鉱は閉鎖されてその人達の遺体は今も海の底に葬られている。このような事故は頻繫に起きていた。
1914年第1次世界大戦が起きて好況に沸いた日本はさらに沢山の労働力が必要だった。ヨーロッパの戦争拡大で注文が増えるうえで労働者の確保が日本産業の最優先の課題になっていた。いわゆる‘募集人’が朝鮮各地に侵入したのもこの時期である。口車に乗って大韓海峡を渡った労働者達は主に密航で入国した。筑豊炭田地域に住んでいて鉱山労働者の生涯を記録したノンフィクション作家上野英信は炭鉱に朝鮮人労働者達を運んだ石炭運搬船を‘奴隷船’と呼んだ。
하시마는 멀리서 보면 군함 한 척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함도라고도 부른다.
하시마에는 1916년 일본 최초로 철근콘크리트아파트가 건설되었다. 채탄을 위해 입도한 광부의 주거와 편의시설을 제공하기 위해 세워진 중고층 아파트들이 군함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端島は遠いところから見ると軍艦が浮いているように見えるため軍艦島とも呼ばれている。
端島には1916年日本で初めて鉄筋コンクリートアパートが建設された。 採掘のために入島した炭鉱夫の住居と、便宜施設を提供するため建てられた中高層建物が軍艦の形をしている。
1945년 하시마의 인구는 5300명으로 일본 내 최고 인구밀도를 자랑했다. 하시마탄광은 가혹하고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지옥섬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1945年端島の人口は5300人で、日本最高の人口密度を誇った端島炭鉱はその過酷な労働環境のため地獄島とも呼ばれた。
1944년 11월 집계한 다카시마탄광의 탄광노무자는 5974명이고 이 가운데 2259명이 조선인이었다. 한 층에 방 5개가 있는 2층 건물 4동에 수용됐다.
1944年11月の集計した高島炭鉱の炭鉱労務者は5974人でこの中で2259人が朝鮮人だった。ひとつの階に部屋が五つある二階建ての四棟に収容された。
노동력 부족 때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개 농촌 출신이고, 채탄을 위한 별도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労働力不足のせいで強制的に動員された朝鮮人労働者はほとんどが農村出身者で、採掘の為の訓練は受けていなかった。
나가사키의 시민단체 ‘인권을 지키는 회’가 1925년~1945년까지 화장 기록을 통해 파악한 조선인 사망자는 122명이다.
長崎市の市民団体‘人権を守る会’が1925年~1945年まで火葬の記録で把握した朝鮮人死亡者は122人だ。
미쓰비시광산의 다카시마탄광이 있었던 나가사키시 다카시마 산 중턱에 있는 공양탑은 천 명 이상의 유골이 묻혀 있다 하여 ‘천인총’으로도 불린다.
三菱鉱山の高島炭鉱があった長崎市高島山中腹にある供養塔は千人以上の遺骨が葬られていると言って‘千人塚’とも呼ばれている。
1920년 건립됐다. 다카시마탄광이 1984년 폐광하면서 납골당에 있던 유골들은 제멋대로 분골되어 부근 절인 긴쇼지로 옮겨졌다.
1929年建立された。高島炭鉱が廃坑になってから納骨堂にあった遺骨はあちこちに分骨にされ、金勝寺に移された。
유골들에 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遺骨に関する記録は不明瞭だ。
메이지 일본의 산업유산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미케탄광에도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는 한켠에 밀려 있다.
明治時代の日本の産業遺産群でユネスコに登録している三井三池炭鉱にも朝鮮人強制動員の歴史は片隅に置かれている。
1995년 탄광 도시 후쿠시마현 오무타시 아마기공원 언덕에 세워진 징용희생자위령비에는 노동자 사택 벽에 씌여진 망향의 낙서를 담은 조형물이 함께 하고 있다.
1995年炭鉱都市の福島県大牟田市甘木公園の丘に建てられた徴用犠牲者慰霊碑には労働者社宅の壁に書かれている望郷の落書きが共に置かれている。
비문에는 “제2차 세계대전 시 이 땅에 강제로 징용되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시다가 불귀의 혼”이 된 넋들을 기리고 있다.
碑文には“第2次世界大戦時この地に強制的に徴用され過酷な労働に遭った帰らぬ魂”と記され、その魂達を弔う。
사키토자키 씨사이드 컨트리클럽의 정문을 지나 왼편으로 사이토자키탄광 갱구 자리 안쪽에 세워진 순직자 위령비. 사이토자키탄광은 1937년 채탄을 시작해서 1964년 폐광했다.
西戸崎シ-サイドカントリ-俱楽部の正門を通って左側に西戸崎炭鉱の鉱の入口の中に建てられた殉職者慰霊碑、西戸崎炭鉱は1937年採掘を始め、1964年に廃鉱された。
순직자 위령비는 1964년 8월에 건립되었다. 위령비에는 “모래 하얗고/소나무 푸르러/이곳 광산에/목숨을 바친/ 굳센 무리들이여”라고 새겨져 있다.
殉難者慰霊碑は 1964年8月に建立された。 慰霊碑には‘砂白く/松青い/ここ鉱山に/命を捧げた/強気の群れよ’と刻んでいる。
정면과 측면에 64명의 순직자 이름이 있다. 조선인 노동자 3명 이름과 더불어 창씨개명한 6명의 이름이 있다.
正面と側面に64人の名前がある。朝鮮人労働者3人と名前を改名した6人の名前がある。
지쿠호 탄광 지대의 절이나 납골당에는 탄광 사고로 죽은 조선인 유골이 아직도 산재해 있다.
筑豊炭鉱周辺のお寺や納骨堂には炭鉱事故で亡くなった朝鮮人の遺骨がいまだに散在している。
1927년 7월31일 다자와터널 공사에서 낙반사고가 발생해 18명이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 5명은 조선인 노동자였다. 다자와터널순난자추모비가 다자와 역 구내에 건립되었다는 기사가 있지만 현재 추모비 소재는 불명확하다.
福岡県田川市見立墓地に保管されている朝鮮人の遺骨の姿。
태풍이 몰아쳐 정전 상황에서 스위치를 끄기 위해 갱 내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16세의 조선인 광부 강상구는 1981년 ‘신오사카 탄광 제3갱 순직자 위령의 비’가 세워질 당시만 해도 ‘신원 불상’이었다.
台風で停電になり漏電の恐れがあるため、電気のスイッチを消しに炭鉱の中に入ったまま帰らぬ人となった16歳の朝鮮人炭鉱夫カンサングは1981年‘新岡炭鉱第3炭鉱殉職者慰霊碑が建てられる時は身元不明だった。
2009년 한국 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로 ‘강상구’라는 이름이 찾게 되는 과정이 위령비 뒷면에 ‘생명 사랑 인권’이라는 제목을 달고 기술되어 있다.
2009年韓国強制徴用被害者真相究明委員会の調査で‘カンサング’と言う名前が判明し、その名前を探す過程が慰霊碑の裏面に‘生命、愛、人権’と言う題名で記されている。
‘15년 전쟁’(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패전까지) 때문에 일본 국내 노동력이 부족하자 모집, 알선, 징용, 강제 동원 등의 형태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동원했다.
‘15年戦争’(1931年満州事変から1945年敗戦まで)のせいで、日本国内の労働力が不足すると、募集、斡旋、徴用、強制動員などの形で朝鮮人労働者が動員された。
지쿠호 지역의 탄광에는 15만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筑豊地域の炭鉱には15万名に至る朝鮮人が動員された。
이 순난비 옆에 있는 설명판에는 “살아서 조국산천과 혈육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억울하게 숨지어간 조선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이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이여 모두 다 력사의 사실을 가슴에 새겨두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ここに集うもの、皆共に歴史的事実を心に刻みたいものです”と言う文書が書かれている。
この殉難碑の横にある説明版には“祖国の山河や親族に再び会うこともできずに無念のおもいで亡くなっていかれた朝鮮人の遺骨が安置されています。
순난비 정면에 써있는 ‘적광(寂光)’이란 ‘상적광토(常寂光土)’, 즉 항상 고요한 빛이 차넘치는 세계인 극락정토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1975년 1월에 세워졌다.
殉難碑正面に書かれている、‘寂光’とは‘常寂光土’つまり常に静かな光が溢れる世界、極楽浄土の姿を表現した言葉だ。1975年に建てられた。
다카와시 석탄역사기념박물관이 있는 교통공원 내 작은 언덕에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그 중 하나가 한국인징용희생자위령비다.
田川市の石炭歴史記念博物館がある交通公園内の小さな丘に日本人、韓国人、中国人犠牲者の慰霊碑がある。
친남한 계열인 재일민단과 친북한 계열인 조선총련이 공동으로 위령비를 건립하기 위해 협의를 진행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해 1988년 4월 민단이 독자적으로 건립했다.
この中のひとつが韓国人徴用犠牲者慰霊碑だ。
이곳에 있던 유골은 현재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모셔져 있다.
韓国系列の在日民団と北朝鮮系列の朝鮮総連が共同で慰霊碑を建てる為、協議をしたが、合議に至らず1988年4月に民団が単独で建立した。
오노다시 신스즈메다(新雀田)탄광 폐산을 계기로 순직자들을 위령하기 위해 만후쿠지(万福寺)에 건립을 추진하면서 신스스메다탄광의 전신인 와카오키(若沖)탄광 순직자도 합사해 1963년 10월 30일에 완성됐다.
小野田市新雀田炭鉱の廃鉱をきっかけに殉職者達を慰霊するため万福寺に建立しつつ、新雀田炭鉱の全身である若岡炭鉱の殉職者も合祀して1963年10月30日に完成した。
127명의 순직자 가운데 9명이 조선인 노동자다.
127人の殉職者の内9人が朝鮮人だ。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탄광은 1914년 채굴을 시작한 해전탄광이다.
山口県宇部市にある長生炭鉱は1914年採掘を始めた海田炭鉱だ。
해수압의 영향으로 낙반하면서 발생한 수몰사고가 1942년 2월3일 일어나 해저 30m 아래에서 작업하던 광부 183명이 사망했다.
海水圧の影響で落盤し、そこから発生した水没事故が1942年2月2日に起き、海底30mで作業中だった炭鉱夫183人が死亡した。
이 가운데 136명이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다.
この内136人が強制動員された朝鮮人労働者だ。
이들의 시신은 아직도 바다 속 갱도에 묻혀 있다.
遺体はまだ海底の炭鉱に葬られている。
조세이탄광수몰사고희생자추도비는 2013년 2월2일에 건립되었다.
長生炭鉱水没事故犠牲者追悼碑は2013年2月2日に建立された。
추도비는 조세이탄광의 환기구인 피아를 의미하는 상징물 기둥 2개에 ‘일본인 희생자’와 ‘강제연행 한국조선인 희생자’를 새겨넣었다.
追悼碑は彼我を意味する柱二つに‘日本人犠牲者’と強制連行した‘朝鮮人犠牲者’を刻み込んだ。
도치기현 니코시에는 동광산으로 유명한 아시오광산이 있다.
栃木県日光市には銅鉱山で有名な足尾鉱山がある。
1940년~1945년 8월까지 2416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다.
1940年~1945年まで2416名の朝鮮人が強制動員された。
도치기현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화장 허가서와 과거장을 조사해서 73명의 조선인이 사망한 기록을 찾아냈다.
栃木県朝鮮人強制連行真相調査団が火葬許可証と過去のデータを調査し73人の朝鮮人が死亡した記録を見つけた。
조반탄광은 후쿠시마현에서 이바라기현에 걸쳐 있는 탄광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조반탄광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2만명 전후.
常磐炭田は福島県から茨木県に至る炭鉱だ。 ある研究によると常磐炭田に強制動員された労働者は2万人前後‘朝鮮人労務者之碑’は1947年10月22日在日朝鮮人連盟によって建立された。
‘조선인노무희생자의 비’는 1947년 10월22일 재일조선인연맹의 주도 하에 건립되었다. ‘산업전사’라는 미명 하에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침략전쟁 때문에 죽음에 이른 조선인 노동자 193명을 기리고 있다.
‘産業戦士’と言う美名の下で大東亜共栄権を確立しようとした侵略戦争のせいで、死に至った朝鮮人労働者193人を弔う。
사도광산은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금은광산이다. 1896년 미쓰비시가 인수한 이후 1989년 채굴이 중단될 때까지 미쓰비시광업 소속이었다.
佐渡鉱山は500年の歴史を持つ金銀鉱山だ。 1896年に三菱が引き受けてから1989年に採掘が中断されるまで三菱鉱業が所有していた。
전시 기간에 조선인 1000명 정도가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금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사도광산에 있는 조선인 광부들은 다른 지역의 광산으로 이동하거나 군수공장에 전환배치되기도 했다.
戦時期間に朝鮮人が約1000人動員されたと言われている。
アジア太平洋戦争末期、金の需要が急激に減ったため佐渡鉱山にいる朝鮮人の炭鉱夫は他の地域に移動するか軍需工場に配置された。
전시 중인 1944년 5월 29일 하나오카광산의 나나쓰다테 갱 낙반 사고로 생매장된 22명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1947년 건립됐다.
戦時中の1944年5月29日花岡鉱山の七ツ館炭鉱の落盤事故で生き埋めにされた22人の犠牲者を弔うために1947年に建立された。
희생자 22명 가운데 조선인은 11명.
나나쓰다테 사건은 격화되는 전쟁 속에서 증산 우선과 안전을 무시한 생산 체제 때문에 발생한 전형적인 인재였다. 도와(同和)광업 하나오카광업소는 사건 후 10년 뒤인 1955년 외무성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犠牲者22人の内朝鮮人は11人、七ツ館事件は激化する戦争の中で、増産優先と安全を無視した生産体制のために発生した典型的な人災だった。
이 보고서에는 조난자들의 위치를 모두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갱도 확보와 생산 유지를 위해 구출 작업을 중단하고 함몰 지역을 매립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この報告書には遭難者達の位置を全て把握し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坑道確保と生産維持のため救出作戦を中断し陥没地域を埋め立てる作業を行ったと記録されている。
생존 광부를 생매장한 것이다.
生存している炭鉱夫達を生き埋めにしてしまった。
이후 나나쓰다테 갱 채굴은 노천 채굴로 재개되었지만 유체 수습이나 유골 발굴은 진행되지 않았다.
以降、七ツ館炭鉱の露天採掘を再開したが、遺体の収拾や遺骨の発掘は行っていない。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1920~1930년대 집중적으로 지어진 여러 발전소와 댐에는 현장마다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있었다. 발전소 공사로 온 조선인 노동자 자녀가 지역 소학교에 100명 넘게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나가쓰가와 발전소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600여명이었다. 1922년 7월 ‘지옥의 계곡’이라 불렸던 공사 현장에서 도망치다 잡힌 조선인 노동자를 일본인 감독이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대적인 진상조사가 벌어졌고 일본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계기가 됐다.
工場稼働に必要な電力を生産するため1920年~1930年代に集中的に建てられた様々な発電所とダムには1000人を超える朝鮮人がいた。発電所工事のため訪れた朝鮮人労働者の子供が地域の小学校に通っていた記録が残っている。その人数は100人を超えていた。
長津川発電所建設に動員された朝鮮人労働者は約600人だった。1922年7月‘地獄の渓谷’と呼ばれていた工事現場から逃げようとして捕まった朝鮮人労働者を日本人の監督が虐殺する事件が起きた。大々的な真相調査が行われ日本にいる朝鮮人労働者達が独自的に労働組合を結成するきっかけになった。
1920~30년대에 걸쳐서 오이카와 철도 공사, 발전소 공사에 많은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강제동원 시기 일본발송전(日本発送電)은 구노와키(久野脇)발전 공사를 진행했고, 공사 현장에는 22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연행되었다.
1920年~1930年代にわたって及川鉄道工事、発電所工事に沢山の朝鮮人が動員された。強制動員時、日本発送電は久野脇発電所工事を進め、工事現場には2200人以上の朝鮮人が連行された。
삼계만령탑은 발전소 공사를 진행한 중부전력과 다이세이건설이 1967년에 건립한 것이다. 사망자 12명의 이름 가운데 3명은 조선인이고 1명은 불확실하다.
三界萬霊塔は発電所工事を進めた中部電力と大成建設が1967年に建立したものだ。死亡者12人の内3人は朝鮮人で1人は不明だ。
오이카와발전소공사는 오이카와의 서쪽 산에 도수로를 굴삭하는 작업이 난공사였다. 공사는 하자마구미와 오쿠라구미가 담당했다.
及川発電所工事では導水路を掘削する工事が一番難工事だった。工事は建設会社の間組と大倉組が担当していた。
1930년대에 이루어진 발전소 공사는 군수산업을 확장하기 위한 ‘국책’ 전원 개발 사업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저임금으로 동원되어 함바에서 생활을 했고, 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다.
1930年代に作られた発電所は軍需産業を拡張するための‘国策’としての電源開発事業だった。低賃金で動員された朝鮮人労働者の中には家族まで連れて来た人もいた。
1936년 11월에 건립된 오이카와발전소 위령탑에는 하자마구미 소속 3명, 오쿠라구미 소속 9명 등 모두 12명의 조선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36年11日に建立された及川発電所の慰霊塔には間組3人、大倉組9人合わせて12人の朝鮮人の名前が確認出来る。
사가미댐은 1940년에 공사를 시작해 1947년에 완성한 일본 최초의 다목적댐이다. 공사를 위해 연인원 350만명이 동원되었다.
相模ダムは1940年に工事を始め、1947年に完成した日本最初の多目的ダムだ。 工事の為、年間350万人の労働者が動員された。
이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가 60%를 차지한다. 조선인만이 아니라 포로가 되거나 강제동원된 중국인도 공사에 참여했다.
この中で朝鮮人労働者が60%を占めている。 朝鮮人だけではなく捕虜になったり強制動員された中国人も工事に参加した。
가혹한 노동과 식량 부족, 질병, 사고 등으로 83명이 사망, 이 가운데 조선인은 17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過酷な労働と食糧不足、疾病、事故などで83人が死亡し、この内朝鮮人は17人と推定される。
원래 나무 묘표만이 있었으나 1962년 위령탑을 건립했다. 52명의 순직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本来木の墓標だけがあったが1962年に慰霊塔が建立された。52人の殉職者の名前が刻まれている。
도쿄도 수도국은 일본 군부의 요구에 의해 오코치댐 건설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을 제방공사, 방공호 공사에 동원했다.
東京都水道局は日本軍部の要求により小河内ダム建設を中断し、労働者達を堤防工事、防空壕工事に動員した。
순직자의 비에는 야마구치저수지제방공사 때 사망한 4명의 노동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2명은 창씨개명한 조선인 노동자. 이름 앞에 본적이 ‘조선’임을 기록하고 있다. 1945년 10월 28일에 세워졌다.
殉職者の碑には山口貯水池堤防工事で死亡した4人の労働者の名前が書かれている。
この中に2人は名前を改名した朝鮮人労働者。名前の前に本籍地が‘朝鮮’と書かれている。1945年10月28日に建てられた。
도쿄도 수도사업으로 16년에 걸쳐서 완성된 오코치댐은 연인원 60만명이 동원된 대규모토목공사였다.
東京都水道事業で16年掛けて完成した小河内ダムは年間60万人が動員された大規模な土木工事だった。
이 댐의 건설은 도쿄도민의 수도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목적. 전쟁 중의 공사로 25명이, 전후의 공사로 62명이 사망했다.
このダム建設は東京都民の水道源を安定して確保する事が目的だった。 戦争中の工事によって25名が、戦後の工事で62人が死亡した。
이 가운데 조선인은 모두 6명. 도쿄도 수도국이 1958년 3월 20일에 건립했다.
この中で朝鮮人は6人であった。東京都水道局が1958年3月20日建立した。
니가타현 시나노카와의 센쥬발전소 부근에 세워진 오키다테 순직비. 오카다테 방수로 공사 중 순직한 노동자를 위령하기 위해 니시모토구미가 1937년 세웠다.
新潟県信濃川千寿発電所付近に建てられた沖立殉職碑。 沖立放水路工事中に殉職した労働者を慰霊するため西本組が1937年に建てた。
‘安ヒ伏’이라고 한자와 히라카나를 섞어 새겨놓은 이름은 조선인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다.
‘安ヒ伏’と漢字とカタカナを混ぜて刻まれている名前は朝鮮人労働者の可能性が高い。
구 철도성은 철도 운행을 위한 전원을 개발하기 위해 시나노카와 3곳에 댐과 발전소를 건설했다.
旧鉄道省は鉄道運行のための電源を開発するため、信濃川3ヶ所にダムと発電所を建設した。
미야나카댐은 발전소의 취수구. 1기 공사는 9년이 걸려 1939년에 완성되었고, 1940년부터 2기 공사가 진행되어 1945년에 완성되었다. 순직자위령의 비는 미야나카댐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있다.
宮中ダムは発電所の取水口だ。 1期の工事は9年にわたり1939年に完成し、1940年から2期の工事が進んで1945年に完成した。殉職者慰霊の碑は宮中ダムが見える丘にある。
1936년 9월에 세워진 비에는 조선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창씨개명한 조선인 듯한 이름이 3명 보인다.
1936年9月に建てられた碑には朝鮮人の名前は見られないが名前を改名したと思われる名前が3人見える。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특수로 일본은 전력 수요가 급증했다. 신에쓰전력은 1200명의 노동자를 동원해 니가타현 나카쓰카와에 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第一次世界大戦で日本は電力需要が急増した。信越電力は1200人人労働者を動員して新潟県中津川に発電所を建設し始めた。
이 가운데 조선인은 600여명. 지옥의 계곡이라 불리우는 호쿠에쓰의 공사 현장에서 도망치다 잡힌 조선인 노동자를 학살하는 사건이 1922년 7월 발생했다.
この中で朝鮮人は600人、‘地獄の渓谷’と呼ばれている北越の現場から逃亡中に捕まった朝鮮人労働者を虐殺する事件が1922年に起きた。
게토라는 노동자들의 숙소가 있던 현장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동아일보는 특파원을 파견해 현장 기사를 보냈다. 이 사건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東亜日報>は虐殺事件を取材するため、特派員を派遣し現場で記事を出した。 虐殺事件は日本にいる朝鮮人労働者達が独自的に労働組合を結成するきっかけになった。
1940년에 완성된 오보나이발전소. 다마카와와 센다쓰카와에서 다자와호수로 이어지는 다자와코도수로공사는 전동굴착기를 사용하지 않고 진행한 수작업의 지난한 공사였다.
1940年完成された小保内発電所。 先達川から田沢湖に繋ぐ田沢湖水路工事は電動掘削機を使用せずに進めた手作業の至難の工事だった。
오보나이발전소 공사는 도호쿠지방을 식량생산과 군수산업의 대 기지로 만들려고 하는 ‘도호쿠진흥계획’의 일환으로 입안된 국책사업이었다.
小保内発電所の工事は東北地方を食糧の生産と軍需事業の大基地にしようとした‘東北振興計画’の一環として立案された国策事業だった。
히메관음의 설명판에는 다자와코도수로공사로 유입된 독수로 인해 멸종된 물고기의 위령을 위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姫観音の説明板には田沢湖導水路工事に流入された毒水によって絶滅した魚の慰霊のためのものだと記している。
하지만 1990년 부근 절에서 발견된 ‘히메관음상건립취지서’에는 터널공사로 희생된 공사관계자의 공양과 위령을 위한 목적이 가장 중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しかし、1990年に近所のお寺で発見された‘姫観音像建立趣旨書’にはトンネル工事で犠牲になった工事関係者の供養と慰霊が最も重要な目的だったと記している。
























대부분의 위령비나 추모비는 1945년 일본 패전 후 세워졌다. 오키나와 남부 마부니 언덕에 세워진 ‘평화의 초석’이 대표적이다. 1995년 6월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국적이나 신분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전몰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전쟁 범죄가 새로이 규명될 때마다 명단은 추가된다. 지난 6월23일 ‘위령의 날’에는 한국 출신자 이름 2명이 더해졌다.
大半の慰霊碑や追悼碑は1945年の日本の敗戦後に建てられた。沖縄南部摩文仁丘に建てられた‘平和の礎石’が代表的だ。1995年6月に終戦50周年を記念して国籍や身分など関係なくすべての戦没者の名前を記録している。戦争犯罪が新しく糾明される度に名前は追加される。今年6月23日‘慰霊の日’には韓国出身者の名前が2人が加えられた。
일본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배봉기를 비롯해 기쿠마루(당시 28세), 가즈코(당시23세), 하루에(당시 23세), 스즈란(당시 20세), 아이코(당시 16세), 밋짱(당시 16세) 등 조선인 여성 7명은 오키나와현 도카시키 섬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왔다.
日本で初めて日本軍慰安婦被害者で知られたべボンギ(当時30才)を始め、きくまる(当時28才)かずこ(当時23才)はるえ(当時23才)すずらん(当時20才)あいこ(当時16才)みっちゃん(当時16才)など朝鮮人女性7人は沖縄県渡嘉敷島にある慰安所に連れていかれた。
박수남 감독이 만든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1991)에도 증언을 했던 배봉기 할머니가 죽은지 닷새 만에 발견된 사건을 계기로 모뉴먼트 건립 운동을 통해 세워진 위령비다.
パクスナム監督が作った<アリランの歌-沖縄の証言>(1991)に証言したべボンギさんが亡くなって五日後に発見された事件をきっかけに、モニュメント運動を通して建てられた慰霊碑だ。
다시는 침략전쟁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진실을 증언하고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광장이 될 것을 염원하면서 1997년 11월 조성된 공간이다.
二度と侵略戦争が起きないように真実を証言して命の讃美歌を歌う広場になることを願いながら1997年11月に造成された空間だ。
1975년 마부니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에 초입에 세워진 한국인위령탑은 징병, 징용으로 동원된 1만 여명의 피해자를 상징하는 돌들로 커다란 무덤을 만들었다.
1975年に摩文仁沖縄平和記念公園の入口に建てられた韓国人慰霊塔は徴用や徴兵で動員された1万人の被害者を象徴する石であり、巨大な墓となった。
돌은 한국의 각지에서 모았다.
石は韓国の各地で集めた。
한국인위령비는 대외적으로 민단 오키나와현본부가 중심이 되어 건립을 했지만 한국 정부의 절대적인 재정지원이 있었다.
韓国人慰霊碑は対外的に民団沖縄本部が中心になって建立したが、韓国政府の絶対的な財政支援があった。
1974년 ‘전시 중 오키나와에서 한국인 대량학살이 있었고, 북한이 위령탑 건설을 위해 모금을 진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주일한국대사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북한보다 먼저 세우겠다’라고 보고하며 이뤄졌다.
1974年‘戦時中沖縄で韓国人の大量虐殺があって、北朝鮮が慰霊塔の建設のために募金をしている’という情報を入手した駐日韓国大使が朴正熙大統領に‘北朝鮮より先に建てる’と報告をしてから慰霊塔の建設が始まった。
당시 한국 외교통상부는 (위령비 건립의) 주목적을 ‘오키나와 침투를 기획하는 북한의 책동 봉쇄’라고 규정하고 ‘총련의 탑 건립 신청은 허가하지 않도록 일본 정부에 강력히 요청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当時韓国の外交通商部からは‘‘(慰霊碑の建立の)主な目的は‘沖縄浸透を計画している北朝鮮の策動封鎖’と規定して‘総連の塔’の建立は許可しないように日本政府に強く要請しろ’’との指示もあった。
한국인위령탑의 건립과정은 한반도 남북의 분단과 대립이 오키나와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韓国人慰霊塔の建立の過程は朝鮮半島の分断と対立が沖縄でも行われている事を象徴する事件だった。
오키나와전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오키나와 남부 마부니 언덕에는 평화의 초석이 세워져 있다.
沖縄戦の最後の戦闘があった沖縄南部摩文仁丘には平和の初石が建てられている。
평화의 초석은 종전 50주년을 기념해서 국적, 군인과 민간인 여부에 관계없이 오키나와전 전몰자 이름을 모두 기록하기 위해 1995년 6월에 건설되었다.
平和の初石は終戦50周年を記念して国籍、軍人、民間人を区別せずに沖縄戦没者の名前で全て記録するため、1995年6月に建設された。
평화의 초석에는 오키나와 출신자를 비롯한 일본인 22만6936명, 외국인 1만4587명 등 모두 24만152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平和の初石には沖縄出身者を含む日本人22万6936人、外国人1万4587人など合わせて24日万1525人のなまえが刻んでいる。
외국인 전몰자 가운데 북한 출신자는 82명, 한국 출신자는 380명이다.
外国戦没者の中で北朝鮮出身者は82人、韓国出身者は380人だ。
올해 6월 23일 ‘위령의 날’에 한국 출신자 2명의 이름이 새롭게 새겨졌다.
今年、6月23日‘慰霊の日’に韓国出身者2人が新しく追加された。
1944년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고, 미군이 상륙한 3월27일과 28일 도카시키 섬에서는 섬주민 330명이 ‘집단자결’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1944年米軍の爆撃が始まり、米軍が上陸した3月27日と28日、渡嘉敷島では島の住民330人が‘集団自殺’を図った悲劇が起きた。
시라타마의 탑에는 일본 본토 군인 81명, 군인군속 91명, 방위대 42명, 주민383명, 그리고 ‘위안부’ 1명이 모셔져 있다.
白玉之塔には日本本土軍人81人、軍人軍属91人、防衛隊42人、住民383人、そして慰安婦1人が祀られている。
탑에 이름은 없지만 처형 당한 3명과 아사한 7명, 미군기의 기총소사로 사망한 ‘위안부’ 1명 등 11명의 조선인이 모셔져 있다.
塔に名前はないが処刑された31人、餓死した7人、米軍機の機銃掃射で死亡した慰安婦1人の合計11人の朝鮮人が祀られている。
오키나와현의 나하시 슈리성 땅 밑으로는 오키나와전을 지휘하던 일본군 제32군 사령부의 지하호가 있다.
沖縄県の首里城の下には沖縄戦を指揮した日本軍第33軍の司令部の地下壕があった。
지하 30m, 남북으로 390m에 이르는 지하호 건설은 조선인 군부(군소속 노동자)가 동원되었고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지하호 안에는 위안소도 있었다고 한다.
地下30m, 南北390mに至る地下壕建設は朝鮮人軍部(軍属労働者)が動員されて、過酷な労働に苦しめられた地下壕の中には慰安所もあったという。
오키나와는 일본 고등학생들이 평화를 생각하는 수학여행을 많이 한다.
沖縄は日本の高校生達が平和について考えるための修学旅行に行く場所だ。
하지만 이제는 평화기행도 시들한 모양새다. 지하호 입구에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남기고 간 오래된 종이학이 남아 있었다.
しかし、今は平和紀行も少なくなっている。 地下壕入口には修学旅行に来た学生達が置いていった古い千羽鶴が残っている。
‘다치소’는 다키쓰키 지하창고를 의미하는 암호명.
‘タチソ’は高槻の地下倉庫を意味する暗号名で、高槻成合地域の山間部にある約30ヶ所のトンネル郡を指している。
다카쓰키의 나리아이(成合) 지역 산간부에 30여개의 터널군을 지칭한다. 원래 육군의 저장고로 계획되어 1944년 11월 공사가 개시되었지만 1945년 2월 가와사키 항공기 공장으로 사용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本来陸軍の貯蔵庫として計画され1944年11月に工事が開始されたが、1945年2月には川崎航空機工場で使用する事が決定された。
공사에는 지역 주민은 물론 학생들도 동원되었고, 3500명이 넘는 조선인도 동원되었다.
工場には地域住民はもちろん、学生達も動員されて3500人を超える朝鮮人も動員された。
나라현 덴리시에 있는 야나기모토 비행장은 1943년부터 일본 패전때까지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 공사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로 동원되었다. 또한 조선인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조선반도에서 끌려온 역사를 담고 있다.
奈良県天理市にある柳本飛行場は1943年から日本敗戦まで工事が進んでいた。 この工事には朝鮮人労働者が強制的に動員された。 また、朝鮮人の女性が日本軍の慰安婦として朝鮮半島から連れてこられた歴史を持っている。
지금은 논으로 변한 야마토 해군항공대 야마토기지 유적지에 1995년 8월 덴리시교육위원회가 처음 설명판을 세웠다.
現在は田んぼに変わった大和海軍航空隊大和基地遺跡地に1995年8月に天理市教育委員会初めて説明板を建てた。説明板には朝鮮人労働者と朝鮮人慰安婦を強制動員したという内容が入ってる。
설명판에는 조선인 노동자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2014년 4월 시교육위원회는 설명판 내용 가운데 ‘강제성’이라는 표현이 불확실하다라는 이유로 철거했다.
しかし、2014年4月に市教育委員会は説明板の内容の内‘強制性’と言う表現が適切じゃないと言う理由で撤去した。
일본의 덴리시와 자매도시인 충북 서산시의 시민이 함께 2019년 4월13일 설명판을 다시 설치했다.
日本の姉妹都市の忠清北道ソサン市の市民が天理市と一緒に再び説明板を建てた。
1944년 12월7일 도카이 지방에 진도8의 대규모 지진이 일어났다.
1944年12月7日東海地方に震度8の大規模な地震が起きた。
군용기를 생산하고 있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 도토쿠 공장의 건물은 거의 붕괴했다. 이 공장에 동원되었던 노동자와 근로정신대원 57명이 지진으로 사망했다.
軍用機を生産していた三菱重工業名古屋航空機製作所の建物はほぼ崩壊した。 この工場に動員された労働者と勤労挺身隊員57人が地震で亡くなった。
이 가운데 6명은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돈도 벌게 하고 학교에도 다니게 해주겠다고 속여 데리고 온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이었다.
この内6人は、労働条件の良い工場に就職できて学校にも通うことができるとだまされて連れてこられた朝鮮女子勤労挺身隊員だった。
1897년 도난카이지진희생자조사추도실행위원회가 피해자들을 조사하면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동원이 세상에 알려졌다.
1897年東南海地震犠牲者調査追悼実行委員会が被害者を調査したことによって朝鮮女子勤労挺身隊員が世に知らされた。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이곳에 진실을 새긴다’라는 비명의 추도비는 1988년 세워졌다.
‘悲劇を再び繰り返さない為、ここに真実を刻む’という碑文の追悼碑は1988年に建てられた。
도요카와해군공창은 700개의 공장에 6만 명이 일하던 동양 최대 규모의 해군용총화기탄약제조공장이다. 1945년 8월7일 미군의 공습으로 2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豊川海軍工廠は700ヶ所の工場で6万人が働いた東洋最大規模の海軍用銃火器弾薬製造工場だ。 1945年8月7日のアメリカの空襲で2500人以上が死亡した。
강제동원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도 포함되어 있다. 공양탑에 새겨진 조선인의 이름은 23명.
強制動員された朝鮮人労働者も含まれている。
‘도요카와해군공창화공부종업원명단’에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출신 150명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20대 초반이다.
供養塔に書かれた朝鮮人の名前は23人、‘豊川海軍工廠工夫名簿’には慶尚道、忠清道、全羅道出身150人の名前が残っている。大半が20代前後だ。
1946년 9월23일 완성했다.
1946年9月23日に完成された。
중국과 동남아 전선에 군인으로, 연합군의 포로를 감시하던 포로감시원으로 있었던 조선인 148명은 전후 국제전범재판에서 사형, 종신형, 장기구금 등의 선고를 받았다.
中国と東南アジア戦線に軍人として連合軍の捕虜を監視する捕虜監視員になった朝鮮人148名は戦後国際戦犯裁判で死刑、終身刑、長期拘禁などの宣告を受けた。
BC급 전범이 된 조선인들이다.
BC級戦犯になった朝鮮人達だ。
싱가폴 창기에서는 146명의 일본군 군인군속에 대한 연합군의 군사재판이 열렸다.
シンガポールチャンギでは146人の日本軍軍人軍属に対する連合軍の軍事裁判が行われた。
이들은 BC급 전범자로 지목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この朝鮮人たちはBC級戦犯者にされ死刑宣告を受けて処刑された。
싱가폴창기순난자위령비에는 싱가폴에서 BC급 전범으로 처형된 조선인이 15명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シンガポールチャンギ殉難者慰霊碑にはシンガポールでBC級戦犯として処刑された朝鮮人15人の名前が残っている。
도쿄도 하치오지시 하쓰자와마치와 다카오마치 산간 지역에 있는 지하호다. 전쟁말기 일본 육군의 주문으로 나카시마 비행기의 항공기 엔진제조를 위한 지하호로 굴착되었다.
東京都八王子市初沢町と高尾町の山間地域にある地下壕だ。 戦争末期日本陸軍の注文で中島飛行機の航空機のエンジン製造のために掘削された。
1944년 일본 육군의 지하호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지하호 건설에는 노동자 7000명 정도가 동원되었다.
しかし、1944年に日本陸軍の地下壕として建設しはじめた。 地下壕建設には労働者約7000人が動員された。
이 가운데 사이토공업 소속으로 500명 정도가 가족과 함께 2개의 함바에서, 오쿠라토목 관계로 수백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1개의 함바에 살면서 공사에 동원되었다.
この内斉藤工業に所属するおよそ500名が家族と共に二ヶ所の宿舎に、大倉土木工事で数百名の朝鮮人が一ヶ所の宿舎に住みながら工事に動員された。
일본이 패전의 기미가 역력해지던 1944년 11월11일 대본영은 나가노현에 대규모 지하호 건설을 시작한다. 천황은 물론 일본방송협회, 대본영도 대피하는 시설이었다. 1만 명 정도 인력이 동원되었는데, 이 가운데 7000명이 조선인이었다.
日本の敗戦の兆しが明らかになった1944年11月11日、大本営長野に大規模な地下壕の建設を始めた。 天皇はもちろん日本放送協会や大本営も避難出来る施設だった。 約1万人が動員されたがこの内7000人が朝鮮人だった。
8시간 3교대, 12시간 2교대로 지하호의 굴착은 대부분 조선인 노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8時間3交代12時間2交代で地下壕の工事は大半が朝鮮人労働者によって建てられた。
공사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이어져 9개월만에 10킬로미터의 지하호 공사가 진행되었다. 1990년 지하호가 공개된 이후 입구에는 “300만 명의 주민 및 조선인들이 노동자로 강제적으로 동원되어...”라는 내용이 들어간 설명판이 세워졌다.
1990年に地下壕が公開された後、入口には“300万人の住民及び朝鮮人が労働者として強制的に動員され…”と言う内容が書かれてある説明版が建てられた。
2013년 나가노시 관광진흥과는 ‘강제적으로’라는 부분을 접착테이프로 가렸다. 2014년 11월13일 새로운 설명판이 세워졌다.
2013年長野市観光振興課は‘強制的に’と言う部分を接着テープで隠した。 2014年11月13日に新しく説明板が建てられた。
새로운 설명판에는 “조선과 일본인들이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략) 모두가 강제적은 아니었다”라는 표현으로 ‘강제성’을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新しい説明版には“朝鮮人と日本人が強制的に動員された”と書かれてあるが、「すべてが強制的ではなかった」というように‘強制性’を曖昧な表現で記している。





























비석에는 한반도 식민의 역사는 물론 분단의 역사마저 고스란하다. 해방 이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일본에 있는 민족단체도 마찬가지 수순을 밟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죽음 역시 설립 주체에 따라 조선총련에서 세운 위령비는 ‘조선인’으로, 재일민단에서 세운 위령비는 ‘한국인’으로 표기되었다.
돌보지 않은 이름들은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청구서’를 들고 언젠가 돌아온다. 한일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올바로 매듭지어야만 비로소 전쟁에 제대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조선인 위령비가 보여주는 역사를 직시할 때,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된다.
碑には朝鮮半島の植民地の歴史はもちろん、分断の歴史まで入っている。解放以降、朝鮮半島は韓国と北朝鮮に分断された。日本にある民族団体も同じ手順を踏んだ。朝鮮人労働者達の死も設立の主体によって、朝鮮総連が建てた慰霊碑は‘朝鮮人’で在日民団が建てた慰霊碑は‘韓国人’で表記してる。
顧みない名前達は歴史に存在しない。その名前達はいつかは‘請求書’を持って帰って来る。日韓両国が過去の歴史の問題を正しく解決する事によって初めて戦争に終止符を打つことができる。朝鮮人慰霊碑が見せる歴史を直視する時、歴史は過去ではなく未来に行くための踏石になる。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강제 동원되어 오카야마현에 있는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와 차별을 받으면서 일하다 죽은 유골 78위를 모았지만 유족은 물론 생년월일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アジア太平洋戦争の時に強制動員されて岡山県にある軍需工場などで酷使と差別を受けながら働いて死んだ遺骨78位を集めたが、遺族はもちろん生年月日すら把握出来なかった。
일본제국주의의 용서할 수 없는 행위에 ‘깊이 사죄를 표하기’ 위해서 1993년에 세운 비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중국인, 조선인, 연합군 포로들에게 항만 하역 작업과 선박 건조 등의 가혹한 노동을 시켰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アジア太平洋戦争当時の労働力不足を補うため、中国人、朝鮮人、連合軍の捕虜に港湾荷役作業や船舶建造などの過酷な労働をさせた。この過程で多くの人々が犠牲になった。‘この歴史を心に刻んでアジアの平和と共生を誓い’ながら建てた碑である。
‘이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아시아의 평화와 공생을 맹세’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2008년 7월 21일 건립했다.
2008年7月21日に建立された。
일본이 패전하자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해군시설 등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3735명은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에 승선해 8월21일 부산을 향해 출항한다.
日本が敗戦すると青森県大湊の海軍施設などで働いていた朝鮮人労働者とその家族3735人は日本海軍輸送船‘浮島丸’に乗船し、8月21日釜山に向かって出港した。
연합군의 요구에 따라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마루의 항로를 바꾸어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連合軍の要求に従って日本政府は浮島丸の航路を変えて舞鶴港に行くように命令した。
8월24일 오후 5시20분경 마이즈루항으로 들어오던 중 폭발음과 함께 선체가 둘로 갈라지면서 침몰했다.
8月24日午後5時20分ごろ舞鶴港に入港中、爆発の音と一緒に船体が二つに分かれて沈没した。
현지 주민의 구조 노력에도 불구하고 524명이 사망했다.
現地住民達が救助を試みたが525名が死亡した。
비석에는 “우리는 이 우키시마마루 사건을 풍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다짐을 새기고 있다.
碑には“私たちはこの浮島丸事件を風化させるのではなく、これからも忘れてはならない”という誓いを刻んでいる。
1978년 8월24일 마이즈루항이 보이는 ‘순난의 비 공원’ 안에 세워졌다.
1978年8月24日舞鶴港が見える‘殉難者の碑公園’の中に建てられた。
이 사건으로 사망한 북한 출신자 유골은 도쿄 유텐지에 모셔져 있다.
この事件で亡くなった北朝鮮出身者の遺骨は東京祐天寺に祀られている。
1981년 발족한 시민단체 ‘한다 공습과 전쟁을 기록하는 모임’이 공습 등으로 군수 공장에서 일하던 사망자들을 조사했다.
1981年発足した市民団体‘半田空襲と戦争を記録する会’が空襲などで軍需工場で働いた死亡者を調査したところ、1990年代までの調査では空襲死亡者272人以上、地震死亡者154人、労働災害死亡者66人など死亡者432人を把握した
1990년대까지 조사로 공습 사망자 272명 이상, 지진 사망자 154명, 노동재해 사망자 66명 등 사망자 432명을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나카지마 비행기 한다제작소에 조선 청년 1200명이 강제동원되어 공습으로 48명, 노동재해로 1명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この過程で中島飛行機半田製作所に朝鮮の青年1200人が強制動員され、空襲で48人、労働災害で1人が犠牲になった事を発見した。
나카지마비행기가 작성한 명단을 기초로 희생자 이름을 파악, 1995년 7월24일 비석을 세웠다.
中島飛行機が作成した名簿を元に犠牲者の名前を把握し、1995年7月24日に碑が建てられた。
일본에서 유일하게 현립 공원 안에 세워진 조선인강제동원희생자 추도비다.
日本で唯一県立公園の中に建てられた朝鮮人強制動員犠牲者追悼碑だ。
추도비에는 “과거 일본이 조선인에 대해서 크나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의 사실을 깊이 기억에 새기고 진심으로 반성하여 다시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있다.
追悼碑には“過去に日本が朝鮮人に大きな損害と苦痛を与えた歴史の事実を深く心に刻んで心から反省し、二度と過ちを繰り返さない”と決意を表明している。
2004년 4월24일에 건립된 이 비석은 2013년 12월18일 현 당국에 설치 기간 갱신 허가를 신청했다.
2004年4月24日に建立されたこの碑は2013年12月18日に現当局に設置期間更新許可申請を出された。
하지만 일부 시민으로부터 항의를 받은 현 당국은 갱신을 불허하고 비의 철거를 명령했다.
しかし、一部の市民から抗議を受けた現当局は更新を許可せず碑の撤去を命令した。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의 추도비를 지키는 모임’은 2014년 11월 현을 상대로 불허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 소송을 시작, 현재까지 진행중이다.
‘記憶、反省、そして友好の追悼碑を守る会’は2014年11月県を相手に不許可取消を要求する行政訴訟を始め、今も進行中だ。
나카지마 비행기 오타제작소에 강제동원되어 일하던 많은 조선인 가운데 9명이 1945년 2월10일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다.
中島飛行機太田製作所に強制動員され働いた多くの朝鮮人の内9人が1945年2月10日の米軍の空襲で死亡した。
이를 추도하고 한일 양국의 우호 친선을 깊이 하면서 세계 평화에 공헌할 것을 결의하는 의미로 1973년 4월8일 건립했다.
それを追悼し、日韓両国の友好親善を共にしながら世界の平和に貢献することを決意する意味で1973年4月8日に建立した。







